J. A. D. Ver_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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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성서와 해석

십계명은 어떤 종류의 유비도 은유도 섞여있지 않은 정언적이고 직설적인 명령이다. 그 때문에 십계명을 해독하는 작업은, 전해지는 낱말들의 일반적 의미를 그대로 이해하는 작업일 수밖에 없는 듯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성서의 어휘들로 신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모세는 여호와의 뜻에 따라 열 가지의 명령을 석판에 적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모세가 전한 십계명이 신의 뜻과 일치함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신의 뜻이 이스라엘에 전해지기 위한 매개로 모세가 개입하는 까닭에, 십계명을 구성하는 명령들은 다시 나뉘어 복잡한 단계를 이룬다. 각 단계마다 다음의 명령들이 대응한다.

1. 신이 말하고자 뜻하였던 명령
2. 신이 자신의 음성으로 모세에게 발화한 명령
3. 신의 음성을 통해 모세가 청취한 명령
4. 모세가 문자로 기록하고자 뜻하였던 명령
5. 모세가 문자로 기록하였던 명령
6. 모세가 기록한 문자를 통해 유대의 사람들이 읽어낸 명령

문제는 여섯 단계의 명령 모두 일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1과 2는 일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신이 자신의 뜻과 다르게 말한다고 하는 것은 신의 전능함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2와 3, 4와 5, 5와 6은 서로간의 일치를 보장받기 어려운 듯 보인다. 인간의 이해력과 인간 언어의 어휘들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명령의 전달과정에 노이즈를 만들고, 한 인간이 스스로 뜻한 문장과 그가 기록하거나 발화한 문장 사이의 사이의 차이를 생산한다. 우선 신의 뜻과 말을 모세가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모세의 기록을 유대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과정이 문제가 된다. 5와 6은 히브리 문자와 유대 신앙이라는 공통의 코드를 공유한다. 그럼에도 모세가 수행한 인코딩과 유대의 신자들이 수행할 디코딩 사이에 어떤 차이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 차이가 결코 있을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물며 2와 3은 서로 동일한 코드를 공유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신의 언어 규칙을 유한한 인간 이해력으로 포착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이질성은 4와 5 사이에서 생긴다. 모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떠오른 뜻을 물질적/감각적으로 구체화시켜야 할 의무를 가진다. 관념적 이념성은 구체적 물화 과정 속에서도 동일성을 보존한 채 반복되는가? 문자소와 문자소 사이의 공간적 간격, 글자를 써내리는 시간적 간격(모세가 석판에 글을 쓰는 일에는 긴 시간이 걸렸다)이 이념의 동일성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모세가 서술하고자 뜻했던 이념은 모세의 관념 안에서 순수한 자기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이 모든 문제들이 결정적인 난점으로 남는다.
마지막 혐의는 3과 4 사이, 모세가 자의적으로 신의 뜻을 오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세 번째 계명부터 이어지는 너무 구체적이고 다소 세속적인 명령들, 인간이 만들어냈을 문화적 구성물들에 대한 규제들이 정말 신의 것일 수 있는가? 이런 문제들은 성서의 기록을 독해하는 과정에서 단번에 제기되는 문제는 아닐지라도, 하나의 가능한 문제로 남는 한에서, 어휘 그대로 십계명을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에 제동을 걸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서의 텍스트의 의미가 신의 뜻을 척도로 삼아 절대적인 방식으로 해석되기 힘들다는 귀결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물론 다른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신의 전능함은 애초에 이 모든 과정의 조화를 예정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1부터 6까지 모든 단계의 전언들은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전능함이란 그런 것일 수 있다.

41.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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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설득에의 노력

가령 어떤 강의에서 한 교수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고 해보자. "전쟁 상황에서의 살인에 대해서는 구체적 맥락을 막론하고 그 행위에 책임을 물어야 할 그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다. 전쟁 상황에서의 살인이 비난받을 짓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 전쟁 상황에서의 살인은 언제나 정당하다."
이같은 발언 이후에 벌어질 일들 중 예상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아마도 어떤 학생은 학내 커뮤니티나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교수의 발언이 얼마나 반인륜적이었는가에 대해 글을 쓸 것이다. 논란이 커지면 강의는 폐강될 것이다. 어쩌면 이 일은 대형 언론을 통해 보도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되면 교수는 파면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교수는 조용히 사과하고 물러가거나, sns에 불평과 분노가 섞인 글을 게시하고 어쩔 수없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아마 그 교수의 발언이 어째서 적절하지 못했는가에 대해 당사자가 참석할 수 있는 공적인 토론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오늘날 많은 지식인들과 대학생, 그리고 합리적 시민들이 공유하는 정치적 입장들의 집합이 있다. 아마도 좌파의 주장이 섞여있을 테고 문화 식민주의나 획일화에 반대할 것이며, 갖은 차별과 소외, 배제에 반대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같은 입장들을 지지할 수 있는 굉장히 세련된 논증들을 마련해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입장들은 합리적인 사회에서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을 것이고, 때문에 어느정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취급될 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인권의 이념이 그렇다.
물론 이들의 입장은 가장 진보적인 이론들과는 괴리가 있을 것이다. 특히 철학자들은 주류적 이론의 자연화가 얼마나 위험한지 계속해서 지적할 수도 있고, 이 주류적 입장은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으며 진정한 변화를 위해선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할지 모른다. 이러한 "더 진보적인" 입장들을 공유하는 집단의 경우에, 이들의 이론적 논거들은 한층 더 세련되어 거의 반박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더더욱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이 두 종류의 입장들은 그 정도가 어찌되었건 합리적일 것이며(그것이 의도적으로 비합리성을 표방하는 이론일지라도 그럴 것이다.), 아마도 합리적 소통이 가능한 일반 시민들은 이들의 의견에 동조할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들과 합리성의 개념을 공유하지 않는 자들과 마주했을 때이다. 아마 둘은 진지하게 토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상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비합리적일 것이라 여길 것이며, 때문에 토론하려는 노력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까 위에서 말했듯 어떤 입장이 이미 사회에서 자연화되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그 입장의 지지자들은 이미 애초에 토론이라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바로 요즘,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에게 합리적 지성인들이 취하는 태도는 무엇인가? 그들을 몰지각한 이등시민으로 취급하는 것이 전부이다.
탄핵은 정당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무턱대고 비난받는다면, 사회는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할 것이다.

설득의 노력이 중요하다. 토론하고, 설득하는 것이.

39. 미학의 종말에 대해서

1.
예술이 하나의 자율적 제도로 독립되었을 때에야 예술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가능했다. 모든 이론적 범주는, 그 이론이 하나의 분과 학문을 지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범주가 다른 이론의 범주들과 분리되어 있는 그만큼 독립적인 대상을 필요로 한다. 예술 철학은 독립적인 대상으로서 예술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2.
언젠가 예술이 자율성을 잃게 될 것이라면, 그것은 아방가르디즘의 승리나 정치적 미학 프로그램의 성공 때문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유튜브와 애플뮤직이 예술의 탈-자율화의 기도자가 될 것이다. 언젠가 예술이 다만 배경 소품이나 치장물이 되고, 예술적 경험이 온전히 소비 활동으로 환원될 수 있을 때에 예술은 예술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철학은 예술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 만약 철학이 예술을 논의의 주제로 삼는다 해도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경험들에 대한 애가일 뿐일 것이다. 예술이 종말하고 그 자리에 소비만이 남을 때, 미학 또한 종말을 고할 것이다.

나는 예술이나 미학의 종말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슬퍼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예술의 종말은 어떤 전복적인 예술가들의 실천이나 이론적 성과들에 의해 성취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따름이디. 예술적 실천은 그 자신이 "예술"적 실천으로 인지되는 한 결코 예술을 파괴하지 못할 것이다. "자율적이고 유미주의적인 예술이란 없다"는 식의 이론적 시도들 또한, 그것이 사실상 예술적 대상들(아마도 근래의 프랑스 이론가들에 의해 이미지라는 더욱 포괄적이고 정치적일 수 있는 개념으로 대체되었을 그런 대상들)에 대한 반성의 결과인 한, 예술이라는 범주의 자율성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외면적으로는 예술을 예술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단지 상품으로 취급할 뿐인 시장에 의해서는 예술의 파괴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파괴이다. 시장은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꿔놓는 데에 이미 늘 성공하고 있다. 예술을 이미 예술로 취급하고 있지 않기에 시장은 예술을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묻고자 하는 사태를 이미 눈 앞에서 놓쳐버린 미학은 자연히 종말할 것이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반딧불이의 잔존>은 그 종말의 불가능성을 호소하는 한 편의 신파극이다. 언젠가 시장은 소비 앞에 일말의 비주류성(minority, 소수성)도 남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체제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38. 트럼프, 시장, 배타성.

http://m.news.naver.com/hotissue/read.nhn?sid1=104&cid=1035322&iid=49340734&oid=003&aid=0007801135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과 배타적 집단우선주의의 합일점을 우리는 여기에서 본다.

트럼프는 법인세 감소를 통해 미국 기업이 어디에서든 경쟁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귀결로 그가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빤히 알 수 있다. 그는(그리고 시장 안의 모든 국가적 결정권자들은) 경쟁의 종말을 위한 경쟁으로 나아가려 한다. 어느 시점에선 미국의 기업은 다른 모든 나라의 기업들의 그 어떤 위협이나 도전도 경쟁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기업은 언젠가는 계속되는 승리 속에서 경쟁의 불안을 뒤로해야 할 것이다. 그 때 무역의 자유와 공정함은 새롭게 정의될 것이다. 미국은 만들고, 다른 나라들은 사들일 것이다. 위대한 미국은 바로 그 때에만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축제에 허락되지 못한 자들은 끼어들어선 안 된다. 미국인들만이 미국의 승리를 축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미국인은 지리적으로 미국 땅에 있는, 또는 그저 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백인일 것이고, 남성이거나 남성적 권위를 인정해야 할 것이며, 기독교인일 것이고, 이성애자일 것이다. 그러나 배타적으로 내몰린 그들도, 소비자이기를 자처한다면, 그리고 오로지 소비자이기만을 자처한다면, 미국이 주도하는 시장의 일원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미국"은 승리할 것이고, 그 순간 경쟁은 종말할 것이다. 다만 임종 직전의 호흡기가 거짓된 경쟁의 기회로 주어질 것이다. 왜 배타적인가? 그 왕국엔 돈을 벌어들이는 자와 소비하는 자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아니라면 모두 쫓겨날 것이다. 한 사람은 소비자로서만 시장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장 바깥에는 사람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시장 바깥의 세계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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